로비 윌리암스 스토리.. 관심있는 사람은 읽어 보세요. 꽤 길어요.

Hobby/Entertainment 2004.07.28 17:17

마지막에 웃는다(have the last laugh)는 말이 있다. 최후의 승리자란 뜻이다. 로비 윌리엄스가 바로 그랬다. 누가 보아도 지고 있던 게임이었는데, 혹은 딱히 볼 재미조차도 없을 것 같은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줄거리였는데, 도중에 돌연 판세가 뒤집어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왕창. 사람들은 당연히 놀랐다. 그리고 지금은, '즐거워한다'.

∴∴∴∴∴∴ How Peculiar ∴∴∴∴∴∴

로비 윌리엄스를 설명할 만한 키워드는 적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테익 댓(Take That)에서 출발하는 게 안전하고 또 마땅할 것이다. 90년대 초, 당시 한창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을 벤치마킹하고자 한 (듯한) 영국의 남성 5인조 테익 댓은 그 의도에 있어서나 효과에 있어서나 명백히 아이돌 지향의 보컬 그룹이었다. 그리고 그 반향은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약속한 듯 나타났다 - 물론 모국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은 석 장의 히트 앨범과 여덟 곡의 영국 차트 넘버원 싱글, 그리고 국내외로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벌어들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 로비 윌리엄스는 이 그룹에서 제일 어린 막내(74년생으로, 가입 당시 16세)이자 짓궂은 농담과 익살에 특별한 재주가 있는 일명 '개구쟁이 멤버(cheeky one)'로서의 이미지로 기능/활약했다. 그의 이런 캐릭터는 그룹 내의 음악적 중심이었던 게리 발로우나 비주얼 면의 중심이었던 마크 오웬 등과 함께 두드러지는 삼각구도를 이룰 수 있을 정도였고, 사실 따지고 보면 테익 댓의 음악적인 기본 포뮬러는 이 세 사람 혹은 이 세 사람이 만드는 역학관계라고 단언해도 좋았다(나머지 두 명의 멤버 하워드 도널드와 제이슨 오린지는 궁극적으로 '댄스' 파트로, 이들은 그룹 해체 이후에도 솔로 활동은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비 윌리엄스는 처음부터 테익 댓으로서의 활동에 100% 자기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평소 또래 내 친구들이 아이돌 그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안다.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런 나 자신이 실제 그런 아이돌 그룹 중 하나의 멤버였던 거다. 그 사실은 상당히 창피했다.” …라나. 좋아서 한 일이 아니라니 그럼 애당초 왜 시작했냐는 비난이 마땅할 법도 하고 더불어 이제 와서 듣기에는 거기에 자기변명적인 어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무척 어린 나이 때부터 연기와 노래 재주가 타고났고 또 그것이 가진 전부였던 그로서는 아마도 연예계 활동을 위한 효과적인 도움닫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테익 댓은 그 출발 지점으로선 그리 불명예스런 타협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문제는 이 그룹이 기대 이상으로 지나치게 성공해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활동 기간 중에도 로비의 대담한 돌출행동이나 발언들이 종종 뉴스화되곤 했지만 이 경향은 날이 갈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나 점차 나머지 멤버들과의 불화로 이어졌고, 끝내 그는 95년에 탈퇴하기에 (또는 혹자에 따르면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전조였던 양 바로 다음 해에 테익 댓은 해산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소 보편적이고도 지루한 얘기다. 해산 후 이어지는 각 멤버들의 솔로 활동. 그리고 그 솔로 활동의, 그룹 시절에 비해 상대적이거나 혹은 명백한, 실패들. 아역 스타의 전성기를 뒤집지 못하는 안쓰러운 성인 시대의 개막. 뭐 그런 거였다. 게리 발로우도 마크 오웬도 그 솔로 앨범들은 테익 댓을 극복하지 못했다(자타공인 일찍이 '준비된 싱어송라이터'였던 게리 발로우가 그렇게까지 맥을 못 춘 건 솔직히 좀 의외였지만). 여기에 로비 또한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룹과의 골이 깊어지던 시절부터 로비가 좋아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던 말은 자신과 '테익 댓 사이의 음악적으로 심각한 견해 차이'와 더불어 '현재 시도 중인 솔로 작업물은 그런 시시한 팝이 아니라 훨씬 오아시스 같은 스타일'이라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당시 영국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밴드 오아시스 진영에 그 자신 몸소 가담하여 같이 놀아보려고도 했다. 그 험한 맨체스터 친구들의 악명 높은 술과 약 파티들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로비도 자신의 필살기 18금 조크들과 함께 나름대로는 뭐 하나 꿇릴 거 없이 한 성깔하는 연예인이었으나, 곱지 않은 시선에라면 그와 같은 돌연한 노선 전환은 혹시 쓰고 남는 곡이라도 좀 흘려줄까 기대하면서 고향 동기 운운하며 갤러거 눈썹 형제 옆에서 친한 척 구는 비굴한 행색으로 보이기 딱 좋았을 것이다. 물론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영국의 대중음악권에 작열한 브릿팝 붐과 브리티쉬 록 씬의 부흥이라는, 뭔가 그 가슴 벅찬(!) 분위기가 로비에게 고작 얼른 유행 마차를 바꿔 갈아타라는 신호나 보낼려고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건 아닐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 당시 로비 윌리엄스의 발언과 행동들에는 상당 부분 진심인 데가 있었다. (하긴, 영국 내에서 테익 댓의 특별한 점은 아이돌 그룹임에도 비단 기존 소녀팬들만이 아니라 게이 지향의 특수한 청취층,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서도 비교적 고른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인데, 이런 테익 댓의 의외의 다면적 팬층 구조는 때마침 은근슬쩍 불어오던 블러나 오아시스, 펄프 같은 브릿팝 인디 밴드들의 역(逆)아이돌화 및 기존 인디 뮤지션들의 의외의 테익 댓 옹호 경향이라는 기묘한 크로스오버 바람을 타고 로비에게도 결코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아뿔싸. 여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항상 지긋지긋하게 체크되고 관리되는 아이돌 그룹의 그 빡빡한 외모 중심 스케줄에서 벗어나 평소 바라마지 않던 오아시스 스타일로 터프하게 한 몇 달 원없이 놀다보니, 그 후유증으로 몸과 생활은 여지없이 망가진 것이다. 테익 댓의 매력적인 장난꾸러기 막내 소년 로비는 어느 새 누가 봐도 까칠하고 시니컬한 외모의 돌이킬 수 없는 뚱땡이 로비가 되어 있었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 뉴스와 잡지의 지면들은 한결같이 “당신을 파이 귀신으로 임명합니다”스러운 사진들을 마치 오늘의 사건사고 특종처럼 앞다퉈 게재해댔다. 설상가상 96년 중반에 그가 선택한 대망의 솔로 첫 싱글 (조지 마이클 커버)은 실질적인 실패 통첩을 받았다. 솔로 앨범은 내보기도 전이었다. 이쯤이면 대충 어느 정도 뭔가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로비 윌리엄스 - 테익 댓 솔로의 세 번째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희생자. 라는.

∴∴∴∴∴∴ He's been expecting you ∴∴∴∴∴∴

자,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그런 식으로 1년 넘게 마구 몸을 굴리는 것 같던 측은한 'ex-아이돌 스타' 로비 윌리엄스가, 자진해서 처음 그때 방탕 라이프스타일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이번엔 자진해서 알콜/약물중독 치료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불과 한 달만에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12킬로 감량, 건강한 혈색, 맘 잡은 헤어스타일)으로 나타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다이어트 광고 전단만큼이나 믿기지가 않는데, 더구나 지난 데뷔 곡 이후로 거의 일년만에 하나씩 내어본 후속 싱글들 'Old Before I Die', 'Lazy Days', 'South Of The Border' 등이 의외로 그렇게 영 죽을 쑤진 않은 거였다. 이 곡들의 싱글 차트 데뷔 포지션은 점진적인 하락세였으나 이전의 'Freedom 90'이 그랬던 것처럼 첫 주 끗발을 그 직후 허무하게 무너뜨리는 약한 모습보다는 오히려 그 지구력에 있어서 좀 더 먼 희망을 걸어볼 만한 양상을 나타냈고, 또한 테익 댓의 음악을 넘어보겠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던 그 자신의 발언에 비추어도 어느 정도 말이 되는 곡들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97년 9월, 데뷔 앨범 [Life Thru A Lens]가 발매되었다. 테익 댓 탈퇴 후 약 2년 간의 방황 만이었다.

그 다음엔 드디어 결정타, 즉 저 가공할 '앤젤 대폭발'이 일어난다 - 이 로비 윌리엄스의 빅 뱅은 97년 12월에 크리스마스 싱글로 발표한 'Angels'가 초래했다. 영국 내에서 통칭 크리스마스 싱글이란 게 갖는 특별한 의미를 새삼 되짚어본다 하더라도, 이 성공은 정말 의외였던 만큼이나 파괴적인 것이어서, 단순히 컴백이라고 할 게 아니라 아예 로비 윌리엄스란 이름을 과거로부터 '거의 완전히' 단절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차트에서는 정작 넘버원이 아니었으나 후폭풍이 오히려 더욱 진면목이었던 이 싱글은, 차후에도 해를 넘기며 한동안 끈질기게 차트와 방송의 인기 고정 레퍼토리가 되었으며(지금도 이 곡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장례식에 쓰고 싶어하는 음악 수위권에 오르는, 발라드로서의 임팩트가 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내친 김에 이미 정상을 차지하고 내려가 있던 [Life Thru A Lens] 앨범을 다시 한번 앨범 차트로 가뿐히 불러들이는 등 효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뿐만 아니라 이 곡의 성공은 이후 발표될 2집 [I've Been Expecting You]의 성공이 실질적으로 그 토대를 두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젠 아무 것도 로비를 막을 수 없었고 로비 역시 테익 댓을 극복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1998년은 명실공히 로비 윌리엄스의 해였다. [Life Thru A Lens]에서는 상기 언급된 곡들을 포함, 다섯 곡의 싱글이 발표되었고 한 곡을 빼고는 모두 톱 텐에 진입했으며 그 중 는 그 해의 라디오 방송 순위 1위였다(앨범 자체는 머큐리 뮤직 어워드 후보에 올랐다). 다음 해부터 본격적으로 싹쓸이 수상 발동이 걸리게 될 브릿 어워드 행진(2002년 현재까지 기록적이라 할 13개 부문 수상)도 이때 시작된 것으로, 이 해에는 최우수 신인상과 최우수 싱글 후보 노미네이션 정도로 해두었다. 심지어 글래스튼베리 페스티벌에도 출연, 당 페스티벌 사상 메인 스테이지 관객 동원 최고 기록을 세우며 화끈하게 요리한 이 날 공연에서 그가 열창한 'Let Me Entertain You' 무대는 데이빗 보위 조차 부럽지 않은 감동의 스펙터클이었다고 관객들은 말한다(바로 3년 전 그곳에서 아이돌 스타라는 냉대를 감수하며 오아시스 백스테이지를 기웃거렸던 기억을 되새기자면 그 아니 감개무량이었겠는가). 이와 같은 록계(인디를 포함한)로부터의 낙점까지 획득한 것은 아마 로비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이 해 멜로디메이커와 NME 독자투표에서는 공히 최우수 솔로 아티스트로 뽑히기까지 했다. 의 국민가요화와 함께 로비 윌리엄스는 명실공히 영국의 국민가수가 되었고, 심지어 어떤 의미에선 브릿팝의 최종 승자마저 펄프가 아닌 로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판세였다.

그 이후? 안 봐도 훤하다. 환골탈퇴한 로비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영국 제1급 인기 아티스트 반열에 올라 있으며 각종 기록과 수상/노미네이션 경력 만큼이나 상당한 분량과 종류의 각종 가십을 제공해온 최고의 뉴스원으로 군림하고 있다. 여기엔 제 버릇 누구 못 주는 여전한 입담(딴에는 웃자고 하는 농담인데 쇼킹할 때가 더 많은)과 쇼맨쉽에 가까운 직접적인 솔직함(말 그대로 stripped-bare honesty다 - 원하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이 남자의 누드를 목격해야 했던 충격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에 원인이 있는데, 그 가십 중에는 전 애인이자 현재 오아시스 리엄 갤러거의 부인인 올 세인츠(All Saints) 출신 니콜 애플튼과의 로맨스(최근 니콜이 당시 로비와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혼자 몰래 지웠던 사실을 폭로하면서 그 파국이 더욱 기구해진) 및 90년대 중반 화기애애했던 잠깐의 시절 이후 그 오아시스 리엄-노엘 형제와 끈질기게 대립해온 불화의 역사도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한다. (후자에 관해서는 재작년이었던가 노엘이 로비를 지칭하면서 “테익 댓 출신의 그 뚱땡이 댄서”라 표현한 데 발끈, 당시 오아시스의 신보였던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를 감안해 노엘의 집에 “너네 새 앨범 잘 들었다, 명복을 빈다”는 애도 화환을 보낸 로비에게 이번엔 리엄이 “까불면 우리 형제가 손봐줄테다”며 들러붙고 여기에 다시 로비가 브릿 어워드 시상식장에서 “그럼 어디 나랑 붙어보시지”라며 공개응전한 그 웃지 못할 일련의 해프닝 때가 역시 피크였었다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엔 서로 털고 화해했다지만 최근 로비가 대규모 넵워스 솔로 공연 건을 수락한 것도 예전에 같은 장소에서 공연했던 오아시스의 관객 동원수를 누르고 싶은 욕심이 부분적으로 작용했다고. 하여튼.) 이런 것들은 물론 역반응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로비 윌리엄스를 이루는 것은 음악만큼이나(혹은 음악 이전에) 퍼스낼러티라는 것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 때 이와 같은 단편들은 꽤 유용하다.

∴∴∴∴∴∴ Sing when you're challenging ∴∴∴∴∴∴

그리고 이번 새 앨범 [Escapology]는 그 '음악을 압도하는 퍼스낼러티'의 정점으로부터 서서히 턴을 도는 듯한 음반이다. 승승장구하며 세 번째 앨범 [Sing When You're Winning]을 내놓았던 2000년 즈음에는 '퍼스낼러티 로비'의 포화상태라고 봐도 좋았다. 그는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고 타이틀 그대로 '잘 나가고 있을 때 맘껏 노래하는' 중인 가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지금까지 한번도 레코딩 작업을 즐길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노래하는 건 좋지만 녹음 과정은 도대체가 흥이 안 나고 스트레스 받는 우울한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사운드트랙에 프랭크 시내트라 커버 'Have You Met Ms. Jones?'로 참여한 게 계기가 되어 이내 자신의 소원(혹은 충동)대로 만들어낸 재즈 스탠다드 커버 앨범 [Swing When You're Winning]은 의외의 보석이었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렇게 잘 나가고 있을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거 한번 거하게 만들어보겠냐는 식의 약삭빠른 기획(부산)물 정도로 치부하던 사람(뜨끔!)에게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줄 만한, 나름의 성의를 다한 꽤 사려깊은 번외반이었지만, 이 앨범은 로비 자신에게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항상 부담을 느껴왔던 그 녹음 작업이란 것에 대한 재고(再考)였다. 뜻밖에 이 앨범 녹음은 흡족하고 즐거웠던 것이다. 그때 받은 탄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내처 지금의 [Escapology]까지 밀어부치면서 그는 말한다. 커버곡집 하나 만들면서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자신의 오리지널 곡들을 부를 때 정작 그만큼 즐겁지 못하다면 그건 진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냐고.

말하자면 이와 같은 '근본으로 돌아오기' 마인드가 이번 앨범의 보이지 않는 바탕 트랙을 먼저 깔았다고 볼 수 있다. 첫 앨범 때와 같이 밴드를 처음부터 편성해 한 방에서 동시에 연습했고 로비는 오버더빙을 가능한 한 자제할 것을, 너무 미끈하게 다듬지 말 것을 제작 전에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프로듀서 스티브 파워 말마따나 전에 없던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겠지만(이전까지 로비는 녹음 작업 시 맘에 들지 않는 게 있더라도 'No'라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좀체 아니었으나 이번 신보에서는 달랐다고 한다) 그 전에 우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해보고 싶은(그래선지 이 앨범에서야 최초로 로비의 자작곡 -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 추모인 'Nan's Song' - 이 실린 것?) 욕구에 충실한 게 아니었을까를 추측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의 통제력의 강화인지 좀더 릴랙스된 태도의 발현인지 이번 사운드는 다소 양면적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예전 'Millennium'처럼 흘러넘칠 정도로 유려하고 융숭하지는 않지만 'Cursed' 같은 곡에서는 그들이 이번에 주지한 바 오버더빙 드문 연주와 스트레이트한 편곡으로도 상당히 괜찮은 싱글 후보곡이 나올 수 있음을 보게 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그 심플한 솔직 노선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앙某씨 말투 같긴 하지만) '이모셔널'하고 '업리프팅'한 효과를 확실히 겨냥한 'Feel'의 경우도, 대망의 첫 싱글로 내보내면서 이렇게까지 편곡을 자제한, 거의 잘 만들어진 데모처럼 들리는 곡은 드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실제로 이 곡에서의 로비의 보컬은 데모 버전, 그러니까 첫 테이크 때의 트랙을 그대로 쓴 것이다. 이유는 이후에 아무리 다시 불러봐도 그 이상 노래가 잘 나온 때가 없어서). 그래도 따로 만든 가사 없이 녹음 당시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그냥 불러제낀 첫 곡 'How Peculiar'의 경우는 또 좀 심하게 스트레이트하게 나가버린 경우겠지만.

또 하나 이 [Escapology]를 두드러지게 하는 점은, 지금까지 로비의 앨범 중에서 이토록 잠재적으로 또 노골적으로 '미국'을 의식한 작품은 없었다는 것. 동어반복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로비는 언제나 가수라기보다는 엔터테이너, 하나의 퍼스낼러티였고, 어떤 면에서 노래는 이 퍼스낼러티를 실어내는 하나의 도구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그 외에 속하는, 타이밍을 잘 잡는 조크나 연예계 게임을 즐길 줄 아는 감각처럼 그를 실질적인 관건으로 만드는 가장 핵심요소들이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먹히기가 힘들다는(“Americans don't get it”), 그러니까 로비는 일종의 지극히 지역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 점에서 특히 가장 피해를 본 것이 바로 미국 공략건이다. 팝 음악사에 있어 미국과 영국이 자타공인 서로 얼마만큼 카운터파트 노릇을 해왔는지 안다면, 명색이 영국 최고 인기가수라는 입장에서 미국 진출이라는 대계는 선택이라기보다는 거의 당위의 문제임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도가 없진 않았지만 지금까지는 그 부문에 있어 그다지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로비의 현재 시점에서, 이번 [Escapology]는 심지어 [The Ego Has Landed](99년에 발매된 미국 공략용 편집반) 보다도 오히려 더 미국적이다. 그것도 아주 체험에서 우러나온 게, 최근 LA에 집을 구입한 로비의 햇빛 예찬들이 'Hot Fudge'나 'Song 3'(그런데 아쉽게도 블러와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듯)에서 아주 대놓고 철철 흘러넘치는가 하면 로비 윌리엄스판 우울한 버디 무비 'Me And My Monkey'에서는 인트로에서부터 마리아치 풍의 트럼펫 사운드가 도입되었다. 'Something Beautiful'도 전에 보기 드물었던 소울풀함이다. 아니,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앨범의 타이틀 및 테마를 'Escapology'로 설정했다는 데서 그 점이 가장 명백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은 탈출묘기의 명인(escapologist)이자 '수갑의 달인'이었던 20세기 초의 전설적인 마술사 해리 후디니(Houdini)가 그 명명에 매개되어있기 때문이다. 동구권 이민자 출신이었지만 스스로는 미국인이라 언제나 자부했던 그는 미국의 아이콘 중 하나로, 이번 앨범 표지에서 실제로 로비는 전성기의 후디니가 즐겨 하던 고층 빌딩 탈출 스턴트 중의 한 장면을 거의 흡사하게 재연해 보이고 있다 - 다분히 나르시스틱한 구세주 포즈로, 마치 수갑이나 구속복 같은 거 좀 전에 우습게 벌써 다 풀어버렸다는 것처럼. 글쎄, 이렇게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도 정말로 탈출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평소 수준의 쇼맨쉽? 알 순 없지만, 그래도 이 장면과 함께 앨범의 최고 트랙 중 하나인 'Love Somebody'를 듣게 되는 기분은 꽤 비장해진다(코러스가 얼마만큼 퀸+에어로스미스스럽든 상관없이). 그가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말은 꼭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

최근 [Escapology] 직후, 로비의 솔로 시절 내내 송라이팅 파트너로 함께 일해 오며 지금까지의 히트곡 대부분을 작곡한 가이 체임버(Guy Chamber, 前 World Party 출신)가 그와 결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타블로이드 신문의 종주 썬誌의 폭로성 기사였기 때문에 조금은 신뢰를 유보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듣는 입장에서는 로비의 앞으로의 곡들이 어떤 색깔을 띠게 될지 굉장히 흥미롭게 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앨범으로 이동통신 광고에 쓰인 'Supreme'이나 맥주 선전에 쓰인 'It's Only Us' 이후를 이을 로비 윌리엄스 반향이 과연 국내에도 구체적으로 한번 나타나줄지 기대해 보는 것 역시도 흥미로운 일이다. [Escapology]는 로비 윌리엄스의 커리어에서 전에 없던 영역을 설정하는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 맨 끝 즈음 따로 꽤 정성들여 준비된 로비의 특별선물도 우연 내지 인내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여기서 문득 드는 생각: 정말, 게리 발로우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글 / 성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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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김밥 2004.07.28 18:5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One who laughs last, laughs best.
    Lastman stand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