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랑(人狼-JINROH)』에 대한, 읽어보고 꽤 잘 썼다고 생각한 글

Hobby/Entertainment 2004.08.23 09:22

4년 전 천리안 SF동호회 (멋진신세계)에 올라왔던 글.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한다는 라이칸드로프나 베어울프의 얘기는 상당히 유명합니다. (이들을 잡기 위해서는 은으로 된 총알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이런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에 빨간 두건과 늑대 이야기를 버무려 내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요?

배경은 60년대의 일본. 독일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일본은 경제개발 위주의 정책을 쓰고, 그로 인해 일어난 빈부의 격차는 사회문제화되어 반정부투쟁으로까지 번집니다. 지방경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수도경찰이 지나치게 세력을 확장해 무력행사에 대한 권력을 독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자 중앙경찰은 내무부 휘하에 지금으로 따지면 스와트와 비슷한 특기대를 만들어내 시위에 투입, 수도경찰을 견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진압 위주의 작전을 펼치는 특기대는 일반 시민들과 수도경찰로부터도 거센 반대에 부딪힙니다.

시위현장. 화염병과 폭탄이 오가고, 진압봉과 발길질, 최루탄이 돌아오는 현장. 격해지는 시위 와중에 특기대가 투입됩니다. 자신이 늑대인 줄 몰랐던 특기대원과 붉은 두건을 쓴 폭탄배달부 소녀와의 하수도에서의 조우. 그는 소녀에게 멈추라고 하지만, 소녀는 벌벌 떨면서도 폭탄을 기폭시켜 죽음을 택하고, 눈 앞의 소녀가 폭약에 의해 고깃덩이가 되는 순간이 망막에 맺혀진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다른 이에게는 파멸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에게 적의를 품지 않았는데, 그는 나의 존재 자체를 그 자신을 파멸시키면서까지 부인하고 싶어했다... 나는 이제 사람을 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과연 특기대원으로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애초부터 그 소녀를 죽일 생각이었다는 말로 어설픈 감상주의와의 타협은 거부합니다. 하지만 눈 앞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광경. 죽은 소녀의 주변을 맴돌며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주인공은 계속 되묻게 됩니다. 비로소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늑대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주인공을 이용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친하다고 믿고 있던 친구, 헨미. 그는 주인공이 속해있는 특기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경찰 내의 비밀스런 움직임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죽은 소녀의 주변에 역시 붉은 두건을 쓴 긴머리 소녀를 집어넣고, 헨미의 기대대로 주인공은 그 소녀에게서 죽은 소녀를 봅니다. 그리고 그 죽은 애의 언니라는 그 긴머리 소녀, 아마미야와의 만남 속에서 그는 다시 묻습니다.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모의전투에서 계속 얼빠진 듯한 행동. 그리고 계속되는 환각. 그리고 그러한 그의 심리를 뚫어보는 듯한 긴 머리 여자아이의 말과 행동, 그리고 빨간 두건이라는 동화집. 그는 자신이 늑대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급속하게 그 여자에게 끌리는 주인공. 그리고, 여자는 헨미가 수립한 공작대로 행동합니다. 특기대 요원과 반군출신의 여성과의 스캔들에 따른 특기대 위상 실추, 그를 바탕으로 한 특기대 입지 약화가 바로 그 시나리오지요.

하지만 사전에 그 시나리오를 꿰뚫어 본 주인공의 상관, 한다가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모든 것이 바뀝니다. 헤미와 그 여자와의 밀회가 담긴. 이것으로 특기대 상관은 그에게 원래부터 주인공에게 감상주의 따위는 자리잡을 수 없었다는 모양새 좋은 바탕을 마련해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찰 내의 특기대를 음해하는 세력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기회로 역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요. 이것이 바로 주인공이 애초부터 소속되어 있었던 전 경찰에 퍼져 있던 특기대의 자체감찰조직, [인랑]의 목표이기도 했구요. 마음 속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지만, 주인공은 한다의 지시에 따릅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리고 자신이 정말 지켜주고 싶어했던 소녀는 청순한 얼굴과 고운 목소리로 그녀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씩 확인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과정에서 소녀도 이 상처입은 영혼의 남자에게 감정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헨미에게 매인 몸.

그 사진을 본 이후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속아넘어갔어야 했었던 주인공이 여자를 데리고 빠져나와 결국 하수구에서 [인랑]과 합류, 여자의 가방에서 도청기를 집어내고,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이러한 속을 처음부터 들여다보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지요. 남자에게 접근한 것은 단순한 공작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의 마음 속에 분명히 있었다는 여자의 울부짖음 속에 주인공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승사자의 얼굴이자 늑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특기대 마스크를 씁니다.

마스크를 쓴 그는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을 겁니다. 나는 원래 늑대였고, 사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칠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의심해본 적 따위는 없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벗을 죽입니다. 헨미는 주인공이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믿지만, 주인공은 주저함조차 없습니다. 단, 여기서 가면 속의 그의 표정은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관객의 몫.

반특기대 세력과의 전투가 끝나고, 주인공에게 한다는 선택을 강요합니다. 다시 의심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된 지금, 애초부터 방황한 적이 없는 철저한 늑대로서 살 것이냐,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다시 되돌아갈 것이냐.

...그리고 그 결단의 증거로 던져진 여자, 아마미야.

결국 방아쇠를 당기고 여자의 죽음에 대해 분명히 동요하는 남자. 그리고 애써 그 동요를 부인하는 나레이션-늑대는 소녀를 잡아먹었다-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이 영화, 연출력 칭찬하시는 분들도 많으신 것 같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무리 건조한 얘기를 건조한 화법으로 하더라도 관객의 감정선은 따라가야 했습니다. 남자가 지하수도에서 특기대 마스크를 뒤집어 쓰는 장면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호흡이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었고, 맨 마지막 아마이야가 울며 유언으로 남기는 빨간 두건의 마지막 대사는 제법 멋을 부린 티가 나지만 역시 너무 오버한다는 생각 뿐입니다. 형식미에 치우친 탓이 아닐까 되짚어 보긴 합니다만, 개인적인 취향일지도 모르지요. 한마디로 볼 사람만 볼 그런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말하는 것에는 놓쳐선 안될 부분이 있습니다.

결과는 모든 과정을 재편합니다. 과정에서 느낀 감정이나 교감,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에 의해 모든 과정이 재편되는 데서 오는 상처를 이 애니메이션, 인랑은 잡아내려 노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신히 이야기만을 연결시키고 단서의 나열에 불과한 연출력의 부족으로 작품 자체에 대해 어지간한 호의를 가지고 보지 않는 이상 이런 미덕이 눈에 들어올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표현의 한계 여부를 떠나 힘만 있다면 불의조차 정의라는 이름을 얻는 세상에서 이런 주제는 충분히 곱씹어볼 거리가 있습니다.



과정과 결과, 인간과 늑대. 그리고 이 양면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비극... 이런 것들을 한갓 스릴러물의 남녀관계나 무기의 고증필름으로만 돌려놓고 보기엔 너무 아깝겠지요.

wrote by 파란날개(sobriety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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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기석 2004.08.23 10:5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공각기동대와 같은 색체와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보게 되었지만
    작품의 주제를 딱 명확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는데
    글 앞부분의 설명을 보니 좀 이해가 가네.
    근데 이 글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인지 한번 더 봐야겠는걸.

  • 미도 2004.08.23 13:0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클리프 행어에서 나오는 대사 中...

    몇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수백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가차없이 총알세례를 퍼붓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그가 겪었을 수많은 고뇌가 가장 잘 드러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인랑의 주인공이 인간과 늑대로서 표현되는 것도 이런 관점이 아닐런지...

    글구 딴지 하나~!
    written by라고..써야 하지 않나 ^^;;
    모...파란날개님의 실수이지만..
    글을 너무 잘 써서..샘 나서..요런 딴짓거리라도..찾아야겠다는 나의 못된 심보 ㅋㅋㅋ

  • 길버트 2004.08.23 14:0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미도 말이 맞다.
    파란날개 wrote: 나 written by 파란날개라고 써야지..